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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스쿨에 가다

홈스쿨에 가다

2013년 5월 1일

 

일러스트레이션 : Gome Alon 

번역 : 42O / 감수 : 정글심, 구이 

 

“아주 높은 비율로, 학교는 어린이들이 멍청해지는 법을 배우는 곳이다.” - 존 홀트

 

내 남동생의 1학년 교실은 재단장한 청소도구함이었다. 통로를 넣을 정도로 공간이 충분치 않아서, 동생과 그의 급우 40명은 책상 위쪽을 기어가서 교실을 나가곤 했다. 그들은 그 해에 정확히 한 번의 현장 학습을 갔는데, 그곳은 조지아의 체로키 카운티 학교 시스템이 애틀랜타 시외로 이사해오는 방대한 가족 유입량을 따라잡기 위해 미친 듯이 지어대었던, 신께 맹세컨대 정말로, 제대로 된 교실이었다. “최대한 똑바로 행동해야 할 거야,” 그의 선생이 말했다, “아니면 절대로 저 교실로 이사 가지 않을 테니까.” 그들은 절대로 그러지 못했다.

 

나는 학교의 다른 쪽 끝에 있었던, 나의 4학년 교실이, 그렇게까지 위생법을 많이 위반하지는 않았다고 간주한다. 천장 대여섯 군데에서 물이 샜지만, 교실에 불이 붙었다면 아마도 그것들이 도와줬을 것이다. 우리 쪽에도 정말로 통로가 있지는 않았다. 책상들은 위쪽에서 떨어지는 물을 피하기 위해 일종의 무정형으로 뒤범벅된 채 배치됐다.

 

우리 부모님은 교실이 어떻게 생긴 지보다는 커리큘럼에 더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3학년 때 저 위쪽 동네에서, 나는 긴 수의 나눗셈에 대해서 배우고 있었고, 그 후 우리 가족은 조지아로 이사 갔는데, 거기서 나는 한 자릿수 덧셈 뺄셈으로 한 단계 내려갔다. 학습지에는 6-2, 3+9, 가끔씩은 1+1 같은 문제들을 담고 있었다. 어느 날, 내 옆의 애가 걔의 책상에서 뛰쳐나갔다. 나는 걔가 1+1을 가지고 나와 함께 웃을 줄만 알았다. 그는 내가 아직도 적응 중이었던 철저한 남부 말투로 내게 말했다. “너 이거 어떻게 하는지 알아? 난 모르겠어.” 학습지의 첫 번째 문제를 가리키면서 걔가 말했다. 팔 더하기 영.

 

뒤따른 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홈스쿨이라는 용어를 마주하게 되었다. 엄마가 무슨 박람회인가 어디에서 사온 핀버튼에 쓰여 있었고, 그 내용은 이랬다:

 

홈은 쿨하지.

 

홈스쿨!

 

먹혀들었다. 다음 사 년 동안, 내 남동생과 나는 홈스쿨링을 받았다.

부모님은 내가 홈스쿨링을 받고 싶은지 스스로 정하는 걸 허락해주셨다. 나는 언제나 학교에 가는 걸 즐겼지만, 아침 여섯 시에 일어나서, 보도블록으로 질질 걸어가서, 추위 속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건 싫어했다. 애들은 시스템과 겨뤄볼 기회를 너무나 적게 받게 된다. 여러분이 열 살이었을 때, 자기 거래용 자산의 종합적인 가치는 야구 카드 한 팩이나 자기 전에 반시간 정도 깨어있는 정도일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는 탈출할 수가 있었다. 난 천 명의 애들 중 한 명만 받을 수 있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네, 라고 답을 했다, 저 홈스쿨에 가고 싶어요. “홈스쿨에 가다.” 나는 그런 식으로 말을 했다. 내가 아무 곳도 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난 여전히 제대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홈스쿨링은 분명히 모든 아이들에게 먹히지는 않겠지만, 내게는 먹혔다. 선택의 자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좋았다. “뭐에 대해서 배우고 싶니?” 엄마가 내게 물으셨다. “날씨요,”라고 내가 말했다. 그래서 엄마는 기상학에 대한 책을 내게 좀 갖다 주셨고, 난 그걸 먹어 치워버렸다. 나는 어떻게 임시 기압계를 만드는지 배웠고 그래프지에 기상학 데이터를 기록했다. 거기에는 그 어떤 한계도 없었다. 내 배움이 언제 끝나는지 정하는 바로 그 사람이 나였으니까. 나는 부모님이 기후 패턴에 대한 대학교 교과서를 파내버리고 너무 이해하기 힘들다는 걸 알았을 때에서야 마침내 그만두었다. “잘했어,” 부모님이 말하셨다. “다음에는 뭘 공부하고 싶니?”

 

엄마는 읽어야할 것들과, 끝내야할 자습서들과, 그러한 류의 목록을 써놓으시곤 했고, 내 학교생활의 길이는 나에게 달려있었다. 내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책을 뒤적거리기로 결정하면, 정오 즈음에는 끝이 났다. 내가 빈둥거렸다면, 저녁 먹을 때까지 나는 “학교에 있었다.” 엄청나게 어른처럼 느껴졌는데, 그건 11살짜리에게는 도취적인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낮동안에는 수학, 과학, 문학, 그리고 내가 흥미롭다고 정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공부했고, 아빠가 직장에서 퇴근해 집으로 오셨을 때, 그는 나와 동생에게 가끔씩 역사 강의를 해주셨다. 그것이 내 홈스쿨링 경험의 대다수였다.

 

그 나머지는 내가 만났던 것들 중 가장 이상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내 경험상, 아이들은 두 가지 이유로 홈스쿨링을 받았다: 내 동생과 나의 경우에, 이건 사립학교에 가지 않으면서 끔찍한 공립학교 시스템을 피하려는 수단이었다, 어쨌든 간에 우리 가족은 그걸 충당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지만, 다른 몇몇 애들에게는, 그것은 공립학교의 사악하고, 세속적인 커리큘럼에서부터 탈출하는 수단이었다. 지구는 6000살이었고, 지구온난화는 신화일 뿐이었으며, 사탄이 우리를 속이려고 공룡 뼈를 묻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어린이들은 다른 식으로 가르침 받으면 안 됐다, 그러지 않으면 지옥의 불타는 연못이 그 어린 양들의 자그마한 사지의 살들을 불태워버릴 것이니.

 

이 두 종류의 아이들끼리 한 주에 한 두 번씩은 “협력적으로 배우는” 날을 위해 모이곤 했는데, 애들 각각이 어느 그룹에서부터 왔는지 구별하는 것은 언제나 쉬운 일이었다. 나와 같은 애들이 있었다- 집에서 부모님이 비틀즈를 틀고, 니켈로디언을 보고, 홈스쿨링을 받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고, 쥬라기 공원을 봤던 애들 말이다.

 

우리는 그것들 중 어떤 것도 절대, 절대로 경험하지 못했던 애들 몇 명과 함께 있었다. 그 전형은 이 한 쌍의 형제였는데, 대니와 데니라고 부를 것이고, 이 친구들은 살면서 한 번도 공립학교에는 발을 디뎌본 적도 없었다.

 

대니와 데니는 텔레비전 시청을 철저히 금지당했다: 나는 12살짜리 대니가 한 번도 <심슨 가족>의 에피소드를 보았기는커녕 그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전혀 없었단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 걔네들은 성경에서 정의하는 지옥에 대해서 길게 읽었다, 그 칠흑 같은 어둠과 타는 듯 한 투명 불꽃과 영원한 고문까지, 하지만 그들이 기독교 카툰 시리즈였던, <맥기와 나>를 시청하는 건 허락되지 못했는데, 그들의 부모가 거기에서의 슬랩스틱 유머를 적절하지 않다고 간주했기 때문이다.

 

걔네들은 대중문화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에서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고, 그들의 놀이친구들은 너무나 선택적으로 골라져서 다른 애들과 상호작용하는 것은 오로지 드물게 허용될 뿐이었다. 그건 확실히 보였다. 걔네들은 사회적으로 어찌나 충분치 못하게 발달했던지, 돌이켜보았을 때, 정말 본격적으로 뭔가 문제가 되었다. 어느 협동 공부 날의 점심 시간동안, 대니는 다른 가족이 가져왔던 프링글스 통을 쳐다보고 있었다. 세속적인 상품인, 간식거리는, 부모에 의해 철저히 허가되지 않았다. 그는 통을 잡고, 뚜껑을 열어젖히더니, 모든 내용물을 자신의 접시에 부어버린 후, 굶주린 삼림지 생물체처럼 감자 칩을 파먹어댔다. 어른 하나가 말을 했다: “대니, 혹시 함께 나눠먹을 수 있을까?” 그는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했다.

 

어느 날, 내가 그들의 집에 가있었을 때, 8살 먹은 데니가 점심 먹기 전에 식사기도를 하자고 청을 받았다. 반쯤 기도를 하다가, 그는 아주 잠깐만 더듬더니, 울기 시작했다. 그냥 우는 게 아니라. 울부짖었다. 대니는 데니에게 역정이 나서 식탁을 가로질러 팔을 뻗더니 할 수 있는 한 가장 세게 데니의 얼굴을 후려쳤다. 양쪽은 눈물바다가 된 채 반대 방향으로 뛰쳐나갔다, 우리 엄마와 동생과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주고받고 있을 때, 걔네 어머니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냥 가끔씩 저러곤 한단다,”하고 말했다. 이건 결과적으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매 협동 공부 날이 끝나기 전에, 대니와 데니는 울어버렸다, 가끔씩은 마땅한 이유조차 없던 채로. 대니는 언젠가 한 번 한 아이가 어젯밤에 <아빠 뭐하세요>를 봤냐고 물어봤는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우리는 <인크레더블 머신>이라고 플레이어가 톱니바퀴와 도르래와 전구로 루브 골드버그 머신을 만드는 일종의 샌드박스 컴퓨터 게임을 하나 갖고 왔었다. 정말로 근사했다. 걔네들도 좋아했고 말이다. 그러다가 게임의 배경 음악이 차분한 클래식 음악에서 이 진부하고, 완전 전형적이게 해변에서 틀 거 같은 록 노래로 바뀌었다. 대니와 데니네 엄마가 의자에서 튕겨 나왔다. “안 돼. 안 돼! 진짜로 안 돼.” 그녀는 빠르게 달려와서 무슨 화재경보기라도 되는 듯이 스피커를 꺼버렸다.

 

언젠가 한 번은, 나이 많은 애들끼리 현장 학습을 가려고 승합차에 올라탔다. 우리는 dc 토크라는, 대니가 이걸 들었단 걸 알았다면 대니네 엄마에게 모욕감을 줬었을 크리스천 밴드를 들었다. 친구들과 함께 예수님을 나누는 중요성에 대한 노래인 “시간이란...”이 흘러나올 때에, 대니는 귀를 스피커 쪽으로 바짝 갖다 댔다. 걔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였다. 나는 걔를 쳐다보았다. 세상에나, 하고 생각했다. 얘 살면서 지금까지 이런 음악 안 들어 봤나봐, 한 번이라도.

 

우리는 한 시간 뒤에 승합차에서 내렸고, 대니는 그냥 거기에 서있기만 했다, 여전히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자신이 무엇을 들었는지 재현하려고 애를 쓰면서 말이다. “째-째-째깍. 째-째-째깍 가버리지.” 걔네 부모님이 실리콘에 상냥하게 털실 몇 개로 땋아준, 그의 내부 회로와 트랜지스터가, 폭발해버리고 불에 붙어버렸다. 그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내가 간주하기에, 홈스쿨링의 가장 거대한 위험은, 당신의 아이가 제대로 사회화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다. 나에게는 홈스쿨링을 받는 또 다른 친구들과, 공립학교에서 만났던 친구들과, 동네 이웃 친구들이 있었으니, 나는 괜찮은 편이었다. 대니와 데니는 꽤나 제대로 그렇지 못했고,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홈스쿨링을 받는 아이들을 위한 야구 리그가 마련되어 있었는데, 벽촌에서 살곤 했던 어떤 애들에게는 이것이 동료들과 함께 있을 유일무이한 진짜 기회였다. 그런 애들 중에 하나가 제이콥이었다. 외야석에서, 걔네 엄마는 제이콥을 컴퓨터 앞에서 빼서 집 밖으로 도통 내보낼 수가 없다면서 우리 엄마에게 안달복달해댔다. 걔는 경기에 스타워즈 모자, 스타워즈 셔츠, 스타워즈 플립 업 선글라스, 타이 파이터 신발, 그리고 엑스 윙 스웻팬츠를 입고 왔다. (가끔씩 나는 내 기억이 불완전해서 그냥 신발과 바지 얘기는 지어내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런 건 도저히 존재할 가능성이 없으니까, 하지만 신께 맹세컨대 나는 정말로 그것들을 보았다.)

 

걔의 피부는 종잇장처럼 하얬다, 조지아에서, 8월에. 몇 달 동안이나 태양빛을 받으러 나온 적이 없던 것이다. 걔는 야구의 규칙을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 12살의 나이에, 물리적으로 물체를 집어던지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것은 “<리틀 야구왕>의 스몰스”처럼 팔이 없던 상황 같은 것도 아니었다. 걔는 그저 무조건적으로, 완벽하게 야구공을 어떻게 던지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걔가 공을 너무 오래 잡고 있으면, 공은 그냥 걔보다 한 발짝 앞에 있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그래도, 스타워즈 얘기하는 건 정말 좋긴 했다. 다른 얘기들은 절대로 하지 않고, 영원히, 그 얘기만을 하는 걸 정말로 사랑했다.

 

다른 애도 있었는데, 스티브라고 부르려는 이 친구는, 저쪽 시골에 살고 있었다. 걔네 부모님은 많은 아이들을 입양했는데, 한 번은 대화 중에, 걔네 엄마가 자기 아이들이 여섯 명 대신에 일곱 명이였다는 거를 잊은 적도 있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스티브의 상대가 되어주기에는 너무 어렸다. 스티브는, 그 결과로, 완벽하게 사회적으로 고립되었다.

 

어느 날은, 엄마들끼리 걔가 우리 집에 하루 동안 놀러오도록 조율을 해주었다. 그는 한 번도 친구가 없었던 아이처럼 굴었지만, TV에서 친구들끼리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봤던 거 같긴 하다. “숲에 가서 졸라 죽이자,”라고 스티브가 말했다. 나는 걔한테 우린 무엇이든 죽여서는 안 된다 말했고, 몇 번씩 새들에게 돌 던지는 걸 그만두라고 설득해야만 했다.

 

친구에 대한 그의 이해는 매우 TV스러웠는데, 얼마나 그랬던지 그는 무슨 종류의 다툼을 만드는 것에 혈안이었다. “너네 동네 나가서 때려 팰 애들 좀 찾을까?” 아니, 난 그러지 않았고, 그래서 걔는 나를 때렸다. 나는 걔에게 멈추라고 말했고, 걔가 나에게 또 다시 팔을 휘둘렀을 때, 나는 걔를 땅바닥에 밀쳤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호모새끼!”라고 걔가 소리 질렀다. 나는 그 날 이후로 그를 전혀 보지 못했다.

일반적으로, 홈스쿨링을 통해 내가 알게 되었던 애들은 매우 특정하게, 백인이고, 복음주의 기독교인에, 남부 지방스러운 타입들이었다. 그것은 동일성의 고립지였고, 그들의 선생들은 그 때도 지금도 나를 놀래키는 온갖 종류의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한 주에 한 번씩, 우리는 내가 도슨 선생님이라고 부를 교사의 집에 모이곤 했다. 선생님은 과학을 가르치셨는데, 그녀는 또한 매우 철저한 창조론자였고, 어느 시점이 되면, 과학은 언제나 과학이 되기를 멈췄다. 언젠가 나는 선생님이 다시 쓰려고 요구했던 과제를 쓴 적이 있는데, 지구온난화가 진짜였다는 암시를 넣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또한 팝 음악의 리듬이 인간의 세포에 암을 일으키는 주파수로 공명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도, 선생님은 왜 자신이 할로윈을 좋아하지 않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최대한 꾀를 부려보고자 했다: “할로윈에 참여하는 것은 부모님들께 달려있는 선택이고, 선생님도 그건 존중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게 악마를 숭상하는 거고, 악마를 받들어 모시기 위해 차려입는 거라고 느껴진단다.”

 

1996년에 매체가 복제 양에 집착하기 시작하자, 도슨 선생님은 그것이 가져올 악에 대한 매우 광범위하게 사변적인 토론으로 과학 수업을 바꿔버렸다. “히틀러의 사악한 군대를 복제하는 건 뭐가 막아줄 건대? 내 생각에는 여러분들이 자라면 일생일대의 문제가 될 거 같다. 너희들은 사악한 복제인간 군단과 싸워야만 할 거야.”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명석하지는 않은 여자애가 열성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히틀러는 미친 사람이었잖아요! 저는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도슨 선생님은 근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래, 그랬단다.”

만약 여러분이 그런 식의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환경에서 자라온 남부 출신의 사람을 알고 있다면, 내가 일찍이 언급했던 그 공룡 뼈 얘기에 익숙할지도 모르겠다. 거짓말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들. 우리 집에서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를 듣긴 했다: 지구가 만약에 6000살이라면, 어떻게 자꾸만 파내고 있는 이 모든 공룡 뼈들을 설명할 수 있죠? 요즘에는, 창조론 박물관은 구약의 인물들이 트리케라톱스를, 완벽한 안장과 함께 타고 다니는 쪽을 고르고 있지만, 내가 알았던 많은 수의 홈스쿨링 받은 애들은 더 간결한 설명을 제공받았다: 사탄이 우리를 타락시키고, 세계가 정말로 오래됐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 그것들을 땅 속에 묻은 것이다.

 

그리고 만약에 여러분이 이쪽 세계에 익숙하지 않다면, 홈스쿨링 받는 아이들의 남북전쟁사는 분명 겁나게 느껴질 거다. “옛날에 이런 말이 있지 않니,” 하고 선생-엄마가 말한다. “승자가 언제나 역사책을 쓴다고. 저기 북쪽에서는,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단다. 사실은 노예제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거였어.”

 

아무튼 간에.

 

“그거 있잖아,” 그녀가 말한다, “성경에서는 정말로 노예들이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친단다. 노예제의 기반이 성경에 적혀 있던 거야.” 나는 내가 여섯 살 때, 조지아로 이사 가기 전에, 켄 번스의 <남북 전쟁>을 본 적이 있었는데, 거기서 노예제에 대해 말하면서 채찍으로 살갗이 넓게 찢겨 벌려진, 한 남자의 등 사진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을 때, 나는 대부분의 여섯 살짜리가 아마도 그랬던 것과 똑같은 반응을 했다: 집의 다른 쪽으로 뛰어가서 울었다.

 

그래서 내가 이걸 들었을 때, 무언가가 잘못됐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주위의 몇몇 애들을 이 메시지를 흡수하고 있었고, 이런 얘기들을 하곤 했다. “내 생각에 남부가 맞았던 거 같아. 그거 있잖아, 아마 나도 남부를 위해서 싸웠을 걸. 내 자유를 위해서 말이야.” 토론하리라 상상도 못했던 주제에서, 내가 얼마나 혼자였는지를 깨닫는 것과 함께, 나는 조용히 있었다.

 

이 협동 공부 기간 동안에, 각 아이들은 남북전쟁 기간 동안의 역사적인 인무로서 독백을 연기하는 준비를 해야만 했다. 나는 충분히 따뜻하게 보이는, 북부의 기관사를 골랐다. 내 (백인) 급우는, 그렇지만, 노예가 되기로 결정했다. 이 말은 그가 블랙 페이스를 하고, 학급 앞에 선 다음에, 끔찍할 정도로 모욕적인 노예 말투를 내뱉었다는 것이다: “나는 목화 따는 노예입니다요! 당근이고말고요! 그리고 우리 노예들은 옥수수 빵을 조오오오옿아합니다요!”

 

나중에, 우리는 두 번째로 각자의 독백들을 연기했다, 가족들 앞에서 말이다. 내 친구네 엄마는 그의 독백에 문제가 있다고 결정했다: 걔의 블랙 페이스에 발랐던 물감이 충분히 검지 않았다는 것이다. 걔는 정확하게 똑같은 짓을 연기했지만, 이번에는 훨씬 더 짙은 물감이 얼굴에 발라져 있었으며, 방 안의 부모는 응원하고 박수를 쳤다. “그게 최고였어,” 그들 중 하나가 말했다.

 

돌아보면, 1950년에나 나왔을 법한 무언가였다. 그 때는 1995년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나의 홈스쿨링도 끝이 났다. 나는 4학년 때부터 교실에 있지 않았지만, 사회적으로는, 나름대로는 빠르게 적응하게 되었다. 내게 정말로 거슬렸던 것은 하루 일과였다. 나는 신용 받는 것과, 내 과제를 마칠 때까지 홀로 남겨지는 것과, 많은 방식으로, 어른처럼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있었다.

 

홈스쿨링을 받는 동안에, 나는 그 자유를 권위에서부터 소중하게 남겨두었다. 어느 한 때에는, 엄마가 나를 박물관에 데려다주셨고, 나는 보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지 돌아다닐 수 있었다. 현장학습을 나온 한 공립학교 학급이 내가 보고 있던 전시물로 지도되어왔고, 내가 그쪽 무리와 함께 움직이지 않자, 보호자와 같아보이던 한 사람이 나를 꾸짖었다. “빨리 움직여!”

 

나는 잠시 동안 그녀를 쳐다본 다음 간단히 이렇게 말했다, “싫어요.” 나는 그 사람이 결과적으론 내가 무리에 속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러기 전까지, 그녀는 말을 하기에는 너무나 화가 있었다. 나는 그녀가 알아차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그냥 돌아서서 전시실을 빠져나왔다. 그 때 나는 12살이었고, 선생님에게 무사하게 대들었으며, 그 기분은, 솔직히 말하자면, 존나게 대단했다.

 

그리고 지금, 사 년 간의 유예 끝에, 나는 다시 한 번 제도적인 권력의 보살핌 하에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의 대부분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가끔씩은 어디에 앉아야 하고, 어디서 걸어야 하고,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지 듣는 것에 분개한다.

 

이 생각을 며칠 전에 하다가 바로 이 정서가 아마도 내가 거의 어떤 수업도 수강하지 않은 채 한 학기만을 다니고 대학에서 중퇴하기로 결정한 주된 이유인 것 같다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던 열 살짜리처럼 그랬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건 마치 또 다시 시스템과 겨뤄보는 거 같았다. 대학에서의 사 년을 보낸, 대부분의 아이들은, 아마도 17년 동안의 제대로 된, 실제 교육을 버텨왔을 것이고, 나는 겨우 아홉 살에 거기서 빠져나온 것이다.

 

세상에, 그건 어수룩한 감정이었고, 나는 미성숙한 아이였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 번,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