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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보이스 관련 글

지구력 풋볼에는 미래가 없다

[17776]에 담긴 아이디어들은 보이스가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생각해낸 것이 아닐 것입니다. 물론 정말로 그러한 아이디어들이 많다는 것도 아니고, 다르게 말하자면, 이미 한 번에 모여 [17776]이 될 여러 아이디어들의 단서들이 이미 나왔던 여러 편의 글에서 예비된다는 이야기죠. 사실 이것은 보이스의 다른 작업에서도 비슷합니다. [꽤나 좋은]의 <24> 에피소드가 업로드되기 한 해 반 전에는 [NBA Y2K]가 진행 중이었던 2014년에 방영되던 <24>의 시즌 9에 대한 다시보기(recap) 시리즈가 있었고요, 2019년의 [밥 위기 사태]의 기본적인 전제 밥들의 끝나가는 흥망성쇠는 이미 한참 전인 2012년에 [밥 기근 사태]라는 글에 이미 제시된 바 있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이렇게 짧은 길이의 글로 종종 나타났던 단편적인 생각들이, [꽤나 좋은] 이후 좀 더 긴 길이의 글이나 영상을 만들 수 있게 되면서 훨씬 더 크고 깊게 탐구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런 의미에서 [17776]의 완성은 이미 여러 군데에서 예비 되어 있었습니다. 직접적인 픽션 작업으로 가면, [팀 티보 CFL 연대기]의 6장과 [17776]의 인터미션에서는 ‘미래’에 대한 보이스만의 관점이 의미심장하게 겹쳐지고, 한편 [17776]에서는 살짝 간접적으로 등장했던 굉장한 길이와 일반적인 너비의 일직선 풋볼 필드는 [20020]에서 아예 전 미국 국토를 덮는 것으로도 이어지죠. 여기서는, 바로 그 두 개의 아이디어를 초점으로 [17776]이 업로드되기 몇 달 전에 올라온 [야구에는 미래가 없다]와, 저 멀리 2011년으로 돌아가는 [지구력 풋볼]을 함께 보겠습니다.

 

[지구력 풋볼]부터 보자면, 확실하게 그러한 기나긴 일직선짜리 풋볼의 개념이 일찌감치 잡힌 게 바로 보일 거예요. 심지어 일종의 지도나 도표처럼 전략 보드를 그려보기도 했습니다. [20020]에 등장하는 ‘볼 게임’의 규정집과 비슷하게, [지구력 풋볼]에는 보이스가 나름 매뉴얼의 형식처럼 꾸린 제안이 있습니다. 한 마일 길이로 넓어진 필드에 있는 그 모든 지형지물과 자연환경들을 뚫고 가야한다는 점과, 필드에서 캠핑하며 나아가듯이 진행되는 경기, 이들을 통해 상상될 수 있는 가능한 전략과 협상이 조금은 익숙한 편이죠. 한편, 어쩔 수 없이 영원불멸하지 않은 선수들을 다루기 때문에 지어지는 2주간의 플레이 기한은, 바로 그 시간적인 문제를 영원히 제거해버린 [17776]으로 들어오면서부터 훨씬 더 극단적으로 커지고 뒤틀릴 여지를 얻게 되죠.

 

다만 2011년의 [지구력 풋볼]에서 2020년의 작업들을 몇몇 발견하는 것들이 재밌기도 해요. 글을 열면서 대뜸 전쟁에 대해 말을 하며, 그 중에서 전략과 전술의 측면을 풋볼에 “극적인 방식으로 적용해보자고” 하는 것은, [20020]에서 주스가 체로키족 원주민들의 ‘스틱 볼’이 전쟁의 대체품이라고 말하는 것과 겹쳐집니다. 더불어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스타크래프트>, <레인보우 식스> 등 각자의 방식으로 전략전술이 필요한 비디오 게임 또한 그렇게 언급이 되고요. 물론 전쟁과 스포츠와 비디오 게임이 그렇게까지 깔끔하게 좋고 나쁜 것들을 떼어낸 채로 다뤄질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전략전술이라는 묘하게 비슷하고 다른 특징들 속에서 이들은 특정한 제한 속에서 최대한 이를 활용해보려는 활동으로서 겹쳐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17776]에서 이미 소개된 세계를 바탕으로 하나의 거대한 경기 속 수많은 사건과 전략전술에 집중하는 [20020]의 모습이 여기서 보이기도 합니다. 말했듯이, 간략한 초안처럼 제시된 이런 아이디어들이, 더 거대한 규모 속에서 맞춰지게 된 셈이죠.

 

그럼에도, [지구력 풋볼]이 이미 어느 정도 예비된 것 같은 보이스의 픽션 작업들에서 오히려 사라지거나 잘 보이지 않게 된 것들이 나오는 것도 재밌습니다. 캔맥주를 까는 캠핑 여행이라든지요. 아니면 ‘이탈행위자’라고는 번역했지만 사실 홀로 떠돌아다니는 부랑자 같은 이미지가 좀 있기도 한 ‘rouge agent’도 그렇습니다. [지구력 풋볼]에서는 다크호스 같은 존재로 언제 어디서 습격할지 모르는 존재지요. 그럼에도, 확실히 [지구력 풋볼]은 [팀 티보 CFL 연대기]의 일직선으로 향하는 ‘규정-밖-플레이’와 ‘쓰레기 풋볼’이 되어버린 [17776]의 오타 게임, 그리고 [20020]과 [20021]의 ‘볼 게임’ 전체의 예고편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게 [지구력 풋볼]에서는 이런 픽션 작업들의 원형이 어느 정도 나타난다면, [야구에는 미래가 없다]는 [17776]에서 꽤나 직접적으로 다뤄지는 소재들의 예고편이 되기도 합니다. [17776]의 질의응답에서도 나왔듯이, SB네이션에서 야구에 대한 기획기사로 냈던 몇 개의 글에 속한 이 글은, 우주로 날아간 뒤 별 일 없으면 시간의 끝까지 존재할지도 모를 파이어니어 10호와 [팀 티보 CFL 연대기]의 6장에서 언급되는 “전략적 포화 지점”에 이미 닿았을지도 모르는 야구를 교차하면서 보이스가 생각하는 ‘미래’의 결정적인 조건이 무엇인지를 얘기합니다. 그것은 방금 말했지만, “전략적 포화 지점”의 유무인 듯 싶네요.

 

“케이크는 이미 구워졌다”라는 영미권의 관용표현은 보이스의 작업 이곳저곳에서 스포츠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 직접적으로 나타나거나, 아니면 간접적으로 암시되죠. 특히나, 야구에서 그렇습니다. [도크 타운]에서 다뤄진 리키 핸더슨의 어마어마한 도루 능력이나, [시애틀 매리너스의 역사]에서 이치로가 거둔 어마어마한 기록들은, 이미 백 년을 넘게 이어져 내려온 미국 야구의 역사의 꽤나 후반부에 위치한 채, 여전히 아무도 성취하지 못한 것을 이루며 “전략적 포화 지점”을 가까스로 조금 더 올린 위대한 성과로 이야기되죠. [팀 티보 CFL 연대기]에서 이 지점에 닿은 스포츠들은 ‘해결’되었다고 여겨집니다. 보이스가 바라보는 야구는 적어도 농구나 풋볼처럼 미국의 다른 스포츠보다 훨씬 더 ‘해결’에 가까워진, 완성된 지 오래이며 천천히 늙어가는 스포츠로 여겨집니다: “야구는 완성된 제품이다. 모든 일차적인 목표들을 끝냈고, 그러지 않을 때까지 그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아마 지금으로부터 억겁의 시간은 걸리겠지만.”

 

동시대 미국 야구 선수 중에서, 그리고 어쩌면 미국 야구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마이크 트라웃(Mike Trout)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그것이 잘 보일지도 모르겠군요: “마이크 트라웃, 야구 역사상 최고의 젊은 타자가 미국에서 두 번째로 큰 시장에서 무시무시한 수치로 된 거인을 만들고 있고, 압도적으로 다수의 미국인은 그에 대해 전혀 들어보지 못했다.” 트라웃이 보이스의 2010년대 결산 글인 [2010년대의 가장 덜 중대한 선수들 10명]에 트라웃을 넣으며 야구에 있어서 10년 동안 위대한 성과를 냈음에도 그가 속한 팀에서도 혹은 야구의 세계 바깥에서도 무언가 거대한 영향이나 의미, 적어도 인기라도 못 받았다고 강조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그럼에도 이러한 트라웃의 존재는 파이어니어 10호가 이미 끝났다고 여겨진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지금까지는 마지막으로 보냈던 하나의 신호와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이스에게 야구는 그런 “전략적 포화 지점”에 거의 닿아버린, [17776]과 [팀 티보 CFL 연대기] 6장의 사람들처럼 이룰 것들과 이룰 수 있을 것들을 정말로 모두 다 이뤄버린 것에 매우 가까워진 스포츠입니다. 성취가 희소가치가 되었고, 더 이상 가능하거나 가능할 수 있을만한 것도, 가능이 가능한 그런 것도 없어졌죠. 그런 의미에서 보이스에게 ‘미래’는 가능성의 유무로 판가름되는 듯싶습니다. 영원불멸한 삶을 살며 그 앞에 끝없는 시간이 놓여있지만, 그 시간동안 새로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없기에, [17776]과 [20020]의 사람들은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게 아니라 끝없는 현재 속에 있을 수밖에 없지요. 야구와 비슷하게, 아니면 미래의 풋볼이나 농구, 아니면 시간에 놓여있는 다른 그 모든 것들이 언젠가 될 모습과도 비슷하게요.

 

개인적으로 이것은 보이스의 가장 근간에 있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에, [지구력 풋볼]이라는 형식을 더한 다음, 이 둘이 맞아떨어질 수 있도록 파이어니어 10호를 비롯한 우주 탐사선들과, 그들이 우주 공간에서 경험하고 있는 제한된 영원불멸함을 동일하게 누리도록 지구에서 영원불멸하게 된 인간들을 설정하면서요. 이미 그런 제한과 포화 지점, 미래와 가능성의 정도가 갖춰진 다음에, 보이스에게 남은 것은 어쩌면 시뮬레이션을 돌리기 시작하는 것밖에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