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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보이스 관련 글

[구대성]의 꽤나 좋은 것들

존 보이스의 [구대성]  <꽤나 좋은>이라는 시리즈 제목을 충실히 따르는 에피소드입니다. ‘꽤나 좋을뿐이지요. 20205월에 레딧에서 한 온라인 투표에 따르면 <꽤나 좋은>14개 에피소드들 중에서 [구대성]은 겨우 9위를 차지했습니다. 한 인물만 집중해서 다루는 다른 에피소드, [로니 스미스]를 보시면 바로 느껴지겠지만 자료의 양이나 구성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야구를 어느 정도 보신 분들이라면 구대성의 이 이야기는 한 번쯤 들어봤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라 유튜브에도 한국 채널들이 소개한 영상이 두 어 개 정도 있고요.

 

그럼에도 [구대성]은 대화나 글, 심지어 같은 소재를 다룬 유튜브 영상들과도 확연히 다른 독보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그건 무엇 때문일까요? 아마도 존 보이스의 특별함은 너무 많이 회자되서 바람이 다 빠진 풍선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어떻게 해서 신선하게 만드는 능력에 있을 겁니다. 이 글은 그 어떻게 어떻게를 풀어보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습니다.

 

우선 인트로입니다. 인상적인 기록 하나 없이 메이저 리그에서 한 시즌을 보낸 구대성이 단 하루, 관중들이 자신을 부르는 함성 소리를 듣게 된다는 시작입니다. 그리고 구글 어스 사용해 뉴욕의 해변과 도시를 청량한 음악과 함께 보고 있으면 이미 1분이 지나가 있습니다. 보이스의 다른 영상과 비교해 그렇게 매끄럽지는 않아도, 평평한 웹 사이트에서 시작해 구글 어스의 전지적 시점으로 이동해 스펙터클을 불어넣는 방식은 꽤나 좋습니다.

 

잠시 음악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요. [구대성]은 저작권 문제로 인해 한정된 몇 개의 라이브러리 뮤직만 쓰기 전의 영상이라 다양한 음악이 등장합니다. 사실상 보이스 영상에서 음악이란 플롯을 쥐고 흔드는 핵심적인 역할을 맞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보이스의 영상을 많이 보신 분들이라면 나중에는 특정한 음악을 듣기만 해도 어떤 방식으로 전개될지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무엇보다 음악 고르는 솜씨가 탁월하지 않나요?

 

예를 들어 필립 콜린스의 ‘I don’t care anymore’은 구대성이 허무하게 삼진 아웃되는 첫 번째 타석에 등장해 웃음거리(farce)’였다는 <뉴욕타임즈> 기사를 어떤 나레이션 보다 더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제가 [구대성]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랜디 존슨을 묘사하는 부분입니다. 파란 배경을 매운 일러스트는 랜디 존슨을 무시무시한 악당처럼 보이게 연출했습니다. 여기서도 음악이 중요하지요. 영 위도우스‘In And Out of Youth’ 마지막 1분을 잘라서 그 리듬에 맞게 자막을 설치하다보니 캐릭터의 선명도가 크게 증가합니다.

 

음악의 이런 배치는 보이스가 힘을 주고 빼는 부분을 깊이 생각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음악 없이 일러스트와 저화질의 영상, 그리고 나레이션으로 비교적 건조한 진행 방식을 선택할 때도 크게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요. 오히려 음악이 없어서 깃발의 방향으로 타구의 크기를 유추하거나 복장, 날씨 등을 분석하는 디테일에 집중할 수 있어요. 특히 해설자들이 얼마나 구대성에 대한 기대를 접었는지 설명하려고 타구 소리와 해설을 함께 겹쳐 놓은 치밀함은 우리가 존 보이스를 계속 기대하며 보게 하는 원동력을 설명해줍니다. 우리는 [구대성]을 보고 있지만 동시에 이 영상을 만들기 위해 수없이 중계 영상을 돌려봤을 보이스의 열심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이 시간(2021116)에도 존 보이스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펌블 디멘션> 시리즈의 새로운 에피소드를 계획 중이라는 데요. 이 속도와 꾸준함이라면 언젠가 존 보이스의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어떤 시리즈가 가장 좋은지 투표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때가 온다면 [꽤나 좋은]은 몇 등을 차지할까요? 흠 제 생각에는 꽤나 좋은 정도에 그칠 것 같네요. 너무 좋은 시리즈를 많이 만들어서요.